| | | 우리가 알고 있는 양녕대군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자신보다 총명하고 왕위에 어울린다고 판단되는 동생을 위해 일부러 기행을 일삼아
세자 자리를 물려준 형?
아니면 여색을 밝혀 수많은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는 바람에 아버지의 진노를 사 폐위된 세자?
이것도 아니면 절간 앞에서 개를 잡아 술을 마신 광인?
역사의 기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양녕대군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므로 어느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여러 정황을 살펴 조심스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유난히 여인들을 좋아했다는 것,
그리고 놓친 왕좌에 대한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왕자의 난’을 도왔던 그가 정작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는데,
정말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없었을까.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장인 김한로는 개국공신이었으며, 태종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장차 보위에 오를
그에게 발 빠르게 줄을 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힘이 왕과 세자로 양분되기 시작할 즈음, 태종은 양녕에 대한 경계를 갖게 되었다.
아들에 대해 소상히 조사하던 중, 태종은 양녕이 풍류를 즐기는 한량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녕이 일으킨 여종과의 추문이나 기생과의 염문은 수도 없이 많으나,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중추부지사 곽선의 첩 ‘어리’일 것으로 추측된다.
어리는 곽선의 집 여종으로 있다가 뛰어난 미모와 자태가 눈에 띄어 곽선의 첩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 곽선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으리라.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 양자 이승의 집으로 올라와 지내던 그녀를 우연히 본 양녕이
그녀를 마음에 품은 것이다.
한 눈에 어리에게 푹 빠진 양녕은 그녀에게 선물을 보냈다.
하지만 어리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가 곽선의 첩이라는 것을 알고도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양녕은 다짜고짜 이승의 집으로 갔다.
오직 어리를 데려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이승을 위협해 어리를 납치해 동궁으로 왔다.
엄연히 남편이 있는 부녀자를 한 나라의 왕세자가 납치한 것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사건은 얼마 못 가 태종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태종은 크게 분노했다.
양녕의 반대파 무리들은 그동안의 세자의 행태를 비판하고 나섰고, 양녕 옹호파는
그를 보호하고 나섰다.
조정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태종은 양녕에게 깊이 반성하라고 일렀고,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양녕의 수하들을 사형에 처했다.
어리 또한 사형으로 엄벌하려 했으나 양녕이 간곡히 말려 궁중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많은 이들이 세자 폐위를 거론하기 시작했지만, 양녕은 어리를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양녕을 안타깝게 보던 세자빈 김씨는 다시 어리를 불러들이게 된다.
물론, 여러 대신과 태종의 눈을 피해 사가의 여종으로 위장시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다시 어리를 만난 양녕은 또다시 그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둘 사이의 아이가 태어나고 말았다.
양녕이 태어난 아이의 유모를 구하다가, 다시 어리의 이름이 태종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태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리를 쫓아내라는 영을 내렸다.
그런데, 양녕이 이를 거부하고 크게 반발했다.
양녕은 어리와 떨어져 지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왕세자 양녕은 폐세자가 되었다.
세자빈 김씨는 친정으로 쫓겨 갔고, 동궁의 문지기와 내시들은 모조리 참수 당했다.
세자에서 폐위된 양녕은 어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이 거부당하자 집 지키는 군사들 몰래
담을 넘어 도망쳤다.
이 사건은 많은 조정대신들이 어리를 모함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어리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는 지경이 되었다.
어리가 죽은 이후에도 양녕에 대한 추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쩌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을 또 다른 비행으로 이겨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기록에 의하면, 태종이 어리의 죽음에 대해서 양녕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뒤늦게 아들의 순수한 사랑을 인정했던 것이다.
뒤늦게 정인을 만나 마음을 준 양녕은 사랑하는 이를 버리도록 강요하는 왕좌에
진저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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