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기독교 500년 기획전에 걸린, 한국작가 작품…6.25 좌절 속에서 그는 왜 이 독특한 성화를 그렸을까
▶ 20년만에 다시 세상에 등장한 '예수의 생애' 30점
지난 2013년 10월 서울미술관에선 뜻밖의 작품이 걸렸다. 운보 김기창(1914년-2001)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예수의 생애' 연작 30점을 선보였다. (운보는 1913년 2월18일에 태어났으므로, 비장의 작품 공개는 타이밍이 살짝 맞지 않았던 듯 하다.) '예수의 생애'는 1951년 한국전쟁 때 처가가 있던 군산으로 피난 간 40세의 운보가 예수의 생애를 조선시대 풍속화로 그려낸 성화다.
 | | 운보 김기창 '예수의 생애' 중 수태고지 |
제1화 '수태고지'를 시작으로 '아기예수 탄생', '동방박사 경배'로 이어지는 예수의 삶은
1년 간의 작업 끝에 29점으로 동양화로 태어났다. 당시 이 작품을 접한 독일 선교사는 연작에 부활을 추가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생애는 모두 30점으로 완결되었다. 이 작품은 1954년 화신백화점 갤러리에서 첫 선을 보인 뒤 한 동안 볼 수 없었는데, 1993년 10월 예술의 전당 운보전에서 다시 등장해 큰 화제를 불렀다.
▶ 운보는 왜 조선인 예수와 성화를 그렸을까
운보는 왜 전쟁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기독교 성화를 한국적인 정서로 담아냈을까. 그는 감리교도였던 어머니 한윤명 여사의 손에 이끌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접했다. 신앙이 독실했던 그는 미국인 선교사 앤더슨 젠슨(Anders K Jenson)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성화 제작을 권했다고 한다. 젠슨의 말이 인상적이다. "예수는 어느 한 나라를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온 인류의 구세주이기에 많은 나라에서 가장 믿음을 확고히 하기 쉬운 방식으로 각자의 모습을 본따서 그린 것입니다." 예수는 반드시 서양인이라 할 수 없으며, 육체적인 구체성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신념이라고 그는 화가를 설득했다.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종교로 정착해야 한다는 논지는 운보를 감화시켰고 마침내 독특한 조선인 예수의 생애로 태어났다. 그는 자서전 '나의 사랑과 예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꿈 속에서 예수의 시체를 안고 지하 무덤으로 내려갔다가 차마 놓고 돌아올 수 없어 통곡하다 깨어난 그날로부터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에 열병을 앓아 귀가 먹었겠는가.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소외된 나를 찾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한 것이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 | 운보 김기창 '예수의 생애' 중 아기예수의 탄생 |
그의 연작은 종교화라는 차원보다, 신앙을 표현하는 간절한 희구같은 것으로 읽을 수 있다고 평론가(서성록)는 말하기도 한다.
피난 시절의 가난과 엄혹 속에서 운보는 화구도 구하기 힘든 여건에서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성화를 그리는데 온 힘을 쏟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 독일 기독교의 중심지로 여행을 떠난, 운보의 성화
2017년 4월 운보의 연작은 먼 여행을 떠났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이 12일 여는 '루터 효과, 기독교 500년' 기획전에 '예수의 생애' 전작 30편을 초대했다. 현재 이 작품의 소장자는 서울미술관 설립자이기도 한 안병광 유니온제약 회장인데 지난 3월 독일 박물관측으로부터 대여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작품은 3월말 항공편으로 이미 운송을 완료한 상태다.
 |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 | 운보 김기창 '예수의 생애' 중 최후의만찬 |
작품은 올 11월5일까지 일곱 달 동안 걸릴 예정인데, 보험 산정가만 해도 100억원 대에 달한다.
보험료는 독일역사박물관 측이 전액 부담하기로 했다. 박물관 관계자(울리케 크레츠슈머 본부장)는 이 작품을 이번 전시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며 하일라이트라고 언급하며 "전쟁 중 피란민의 몸이었던 운보가 재해석한 예수의 생애는 한국 기독교의 상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조선의 풍속화 속에 들어간 예수, 그리고 최후의 만찬
전작 30점 모두가 이채롭고 신선하지만, 보티첼리의 수태고지 장면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조선의 선녀로 바뀌었고 마리아는 노랑저고리에 녹색치마를 입은 처녀로 표현되어 있다. 마리아는 대청마루가 보이는 한옥 안방에서 물레를 돌리다가 멈추며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마구간은 조선의 외양간이 되어 있고 양은 닭으로 표현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에 비견되는 '최후의 만찬'은 한쪽 탁자에 몰려 앉은 다 빈치 작품과 달리 상(床)을 가운데 두고 선비들이 둘러앉아 있다. 선비들의 다채로운 표정과 다 빈치 작품 속의 제자들 표정을 비교해서 살피는 일은 흥미롭다. 12제자의 표정 속에 들어있는 영혼은, 인간의 다채로운 내면의 측면들을 투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운보의 '가리고 싶은 생애', 그 긴 그림자
마지막으로 운보에 대한 얘기를 좀 하자. 구멍난 빨간 양말, 흰 고무신, 그리고 바보산수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바보에 대해선 스스로 이런 말을 남겨놨다. "바보는 덜 된 것이다. 예술 역시 그러하다."
그는 어린 시절 장티푸스의 고열로 청각을 상실했고 언어 장애마저 겪었다. 이당 김은호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선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9년간 여섯 번 입선하고 세번은 특선하는 기염을 토했다. 1937년 24세때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4회연속으로 특선을 하면서 추천작가로 활동한다. 이후 광복 전까지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에 박수쳐주는 친일 활동을 했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총후병사' '적진육박' 등이 이 시기에 그린 친일작품들이다. 이런 활동들 때문에, 1990년대까지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던 그는 놀라운 예술적 성취마저 오명 아래에 가려지고 말았다. 겨레에게서 등 돌린 '성취한 예술가'를 두둔할 수는 없지만, 세계가 눈을 비비고 바라보는 작품세계까지 폄하되는 현실은 아쉬움이 작지 않다.
그의 '예수의 생애' 제 18화는 막달레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과 관복을 입고 갓을 쓴 이들이 주먹을 쥐고 머리를 풀고 고개를 숙인 한 여인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 장면이 생생하다. 그 앞에는 광배가 있는 한 선비(예수)가 서서 그녀를 가리키며 나즉히 그러나 힘있게 말하고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라." 그림을 그리느라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운보를 이즈음에 가만히 떠올려 보게 된다. 영성을 위해 그토록 간절하게 붓을 쥐었던 천재 혹은 인간의, 긴 그림자까지
| 
.gif)
총 등록글 : 4275건
나라를 지킨 용감한 4형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