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위신, 심지어 목숨까지 던져가며 얻으려했던 강력한 유혹의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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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위키피디아) |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침략을 계획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후추'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 전후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나온 일화 때문인데
후추 한줌에 무너지는 조선조정의 기강해이를 들은 히데요시가 침략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
징비록에서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58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유즈야 야스히로(柚谷康廣)라는 인물이 조선 조정대신들과의 축하연에서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주머니를 끌러 후추 한줌을 바닥에 흘렸는데 고관대작들은 물론
노래하던 기생, 악기를 연주하던 악공들이 모두 후추를 주우려고 달려들어 자리가 난장판이 됐다고 한다.
외국 사신을 앞에 둔 공식행사에서 이는 엄청난 국가적 망신이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쓴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야스히로는 "너희 나라는 이제 망했다.
나라의 질서와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 엉망이니 어찌 망하지 않겠냐"며 질타했고,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이런 조선의 정세를 알리자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침략준비를 했다는 일화다.
당시 후추는 전 세계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렇게 국가적 체면을 벗어던지고도 달려들어 주워 갈만큼 엄청난 인기상품이었다.
돈이 있어도 좀체 구할 수가 없는 희귀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후추를 향한 당시 사람들의 열망은 엄청났고,
서구에서 목숨을 걸고 대양을 넘나드는 대항해시대를 연 것도 후추에 대한 열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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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나무에 달린 후추열매 모습(사진=위키피디아) |
사실 고대부터 후추가 이렇게까지 비싸진 않았다고 한다.
후추는 원래 인도가 원산지로 기원전 400년경,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유럽과 동남아일대, 그리고 동양까지 퍼졌다.
강한 중독성을 가진 향에 수요가 계속해서 올라가면서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그러다보니 동서양 가릴 것이 없이 후추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게 됐다.
금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된 후추는 높은 가격 안정성을 가지게 되면서 중세 유럽에서는 금보다 선호되는 안전자산으로 거래됐다.
후추는 통용화폐나 금, 은보다도 선호되는 현물화폐 기능도 했다.
세금, 집세, 채무관계도 한줌의 후추로 대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가격이 좀체 떨어지지 않는 고가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구권에서 후추의 위상은 뱅쇼(vin chaud)라는 음료에 남아있다.
고급와인에 과일, 후추를 집어넣고 끓이는 뱅쇼는 그 당시에 귀족들이
귀한 손님들에게 대접하던 고급음료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급와인의 맛을 버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엔 후추가 워낙 귀하다보니
술에 후추를 잔뜩 넣어주는 것은 최상급 대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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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후추와 정향 등 각종 향신료와 과일을 넣어 끓인 뱅쇼(사진=위키피디아) |
이런 당시 유럽에서 후추 수급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은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시작됐다.
그 이전까지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수급을 받을 수 있던 후추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제국에게 함락되면서 안그래도 비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스만 터키제국은 후추가 들어오는 동방 교역로를 모두 장악한 뒤,
후추가격을 크게 올려 막대한 중계이익을 챙겼다.
더구나 이슬람 국가들이 후추의 주요 생산지인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를
모두 장악하면서 독점교역이 더욱 심해졌다.
생산지의 상인들이 후추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생산량을 고정시키고 수확이 많은 경우에는
후추나무 숲을 불태우기도 하며 수급을 조절하자 가격은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이에 서구권 국가들은 생산지와의 직교역을 원했고 오스만 터키제국을 피해
교역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처음 뛰어든 국가가 포르투갈이었고 흔히 항해왕자로 알려진
엔히케(Henrique) 대공의 노력과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항해 성공으로
새로운 후추 교역로가 뚫렸다.
항로가 열리자 너나할 것 없이 후추를 찾아 인도로 떠나는 항해자들이 늘어났다.
후추장사는 엄청나게 남는 장사로 배 10척이 떠나 풍랑을 만나 9척이 가라앉고
1척만 유럽으로 들어와도 순이익이 5배가 남는 장사였다고 한다.
고수익을 낳는 벤처 사업분야로 후추 교역이 인기를 끌면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새 항로를 개척하고자
항해사들을 고용해 항로를 개척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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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료 무역 항로를 찾아 세계 최초로 지구를 한바퀴 돈 마젤란의 초상(사진=위키피디아) |
이런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신대륙의 발견자로 명성이 높은 콜럼버스와 세계 최초로 지구 한바퀴를 돈 인물로 유명한 마젤란이다.
당시 포르투갈에 비해 항해사업의 후발주자로 뛰어든 스페인은 각국의
유명 탐험가들을 초빙해
탐험대를 꾸려 항로개척에 나서고 있었고, 이 두 사람은 스페인 왕실의 지원하에
항로개척에 나섰다.
선발주자였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세계 일주에 도전했던 마젤란은 새로운 후추 항로를 뚫기 위한 탐험에 나섰다.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항로를 포르투갈이 독점한 상황이라 당시 스페인에서는 아메리카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고 있었고 마젤란의 탐험대는 남미에서 태평양을 건너 동남아시아로 가는
위험천만한 항로를 개척해 결국 후추를 얻는데 성공했다.
기나긴 여정에서 9척의 배 중 1척을 제외하고 모두 잃었고 200여명의 선원 중 18명만 살아남은 처절한 사투였으며
함대 지휘관인 마젤란 역시 탐험 도중 사망했다.
하지만 그 1척에 실어온 후추만으로도 이익이 남았다고 한다.
수많은 탐험가들을 사지로 내몰 만큼 후추의 유혹은 그만큼 강렬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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