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한사랑병원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 여러분께



-머리말-

명절이 다가오면 저는 항상 고향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설날이 다가오니까 이번에도 고향생각이 떠오르는군요. 기쁜 설날을 맞이하여 저의 슬픈 감정을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 여러분께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조지 버나드 쇼와 같이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문장은 새기고 싶지 않습니다. 항상 깨어 있고 사유하며 살고 싶습니다. 편지가 쓰고 싶어졌을 때 용기를 내어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만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사진 설명>

위 사진은 작년 추석에 약 50년 만에 처음으로 1950년대에 뛰어 놀았던 고향 마을 앞 당산나무 밑에 앉아 찍은 것입니다. 50년 만에 앉아있으니 까닭모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 나는 무엇을 위해 옆은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 왔는가?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아! 나는 어디서 왔다가 무엇을 위해 과속으로 살다가 어디로 떠나가려하는가? 새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음악설명>

저는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의 생의 일몰이 다가 왔을 때 들을 음악을 많이 생각해왔습니다. 위에 올린 음악은 그러한 음악들 중의 일부입니다. 저의 생의 일몰이 다가와 붉은 노을이 생기면 여기에 올린 「손목인의 타향살이」, 「전수린의 황성 옛터」, 「홍난파의 옛 동산에 올라」,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김연준의 비가」를 들은 다음에, 해가 지는 순간이 오면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 노래」와 장엄한 낙조를 연상시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Lowell Mason의 Near My God to Thee(주여 임하소서)」를 듣고 싶습니다. 그 후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 들어가면 「포레의 레퀴엠」과 고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을 때 하루 종일 방송에서 흘러나온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오제의 죽음」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족에게는 집에 돌아가 내가 아끼던 음향기기와 음반을 버리지 말고 내 생각이 날 때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듣고, 책과 예술과 단절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당부하려고 합니다.



-이글을 쓰게 된 배경-

저는 최근 갑자가 발견된 병에 대해 절망하고 제 병실 문을 잠그고 한 제자가 손수 수를 놓아 만들어 저에게 선물로 준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울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암이나 불치의 병에 걸려본 분이시라면 제 심정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본질을 조금 이해하고 삶의 지혜를 조금 터득하고 나니 어느덧 내 생의 일몰이 다가 오는 것 같아 형언할 수 없이 슬펐습니다. 죽는 것은 순간이니까 크게 두렵지 않았지만 제가 세상에 태어나 마땅히 해야 될 의무와 인생후반기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 같은 안타까움이 저를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나의 생의 일몰이 다가오고 있다면 무엇인가 유언을 미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가족에게 제가 정리해둔 유언을 당부 했습니다. 그리고 소아청소년과 주임교수와 과장을 불러 제가 혹시 죽게 되면 어떻게 해주라고 당부를 했고, 전체 교실 구성원들에게도 메일로 같은 당부를 하였습니다. 엊그제는 저와 가까이 지낸 후학의 부인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몹시 가슴 아프고 슬퍼서 상주를 안고 울었습니다. 나도 우물쭈물하다가는 정년퇴임할 무렵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들께 감사의 말씀도 못 드리고 떠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전남대학교병원의 모든 구성원들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의 소개-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 여러분! 저는 1975년 2월에 전남의대를 졸업하고 전공의로 5년 근무했고 교수로 31년간 근무했으니 대학병원에 36년간 근무했네요. 그간 제가 대학병원에 크게 기여한 것은 없지만 소아심장학의 불모지였던 우리 의과대학 및 대학병원에 소아심장학의 씨를 뿌려 이제 숲이 우거지고 있습니다. 제가 교수가 처음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소아심장병이 제대로 진단이 되지 못한 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00% 정확히 진단되고 거의 대부분의 환자들이 소아청소년과에서 중재시술로 치료받고 흉부외과에서 수술을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아심장학이 우리나라와 광주·전남지역에 뿌리 내리기 전에는 심장병 어린이들이 외국으로 가서 수술을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진국에서 우리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와서 수술을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도 두 명의 외국 심장병 아이들이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전남의대와 전남대병원과 광주·전남지역사회에 남긴 업적이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제가 정성을 다해 씨를 뿌려 가꾼 학문을 이어받아 전남의대와 전남대학교병원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는 저의 후학들을 앞으로도 계속 사랑해주시고 격려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금 제가 처한 상황 및 심정-

저는 이번에 예기치 않게 발견된 중대한 질병으로 전남대학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저는 관상동맥 조영술 후에 그 결과를 보고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30여 년 동안 수많은 소아청소년 환자들을 눕혀놓고 검사와 치료시술을 시행했던 그 곳에서 환자가 되어 누워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있고 해서 심혈관조영실에서 애써 눈물을 감추려 했으나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눈물을 닦아주시며 따뜻한 위로를 해주신 간호사 선생님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의료진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치료에 실패하고 병실에 돌아와 밤에는 십자가를 가슴에 꼭 안고 울다가 잠들기도 하였습니다. 8동 7충 간호사 선생님들이 친절한 간호를 해주셨고 순환기내과 선생님들과 흉부외과 관상동맥 수술을 담당하시는 교수님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이 있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 한편에는 외로움과 허전함이 남아있었습니다. 저의 젊음을 다 바쳐 대학병원의 발전에 기여한 원로교수가 입원했어도 쌓아놓은 덕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몹시 초라해진 저를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전남의대 2년 후배인 전북대학병원 심장외과 교수가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했더니 그간의 자신의 많은 경험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따뜻한 위로를 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이 저를 찾아와 따뜻한 위로를 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병원 가톨릭 교우와 수녀님이었습니다. 제가 인사 한 번 드리지 못한 수녀님이었습니다. 눈물겹도록 감사했고 천사로 보였습니다. 아! 하느님은 저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지나놓고 보니 저는 남을 사랑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으로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 계속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돕고 격려해주고 사랑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대학병원발전을 위한 비판적 사유를 갖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비판적 글을 거의 쓰지 않는 이유는 제 자신이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 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사죄-

제가 36년 동안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동안에 저의 덕과 수양이 많이 부족하여 많은 구성원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과하고 사죄드립니다. 지금은 진심으로 깊게 반성하고 있고 병원 구성원 어느 분을 만나거나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듯 뚜렷한 이유 없이 또는 자신의 이익과 상반되는 인물이니까 그냥 저를 미워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병원 구성원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움 받을 일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했다면 그리고 저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면 모두가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러하오니 저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병 자체의 특징이 제 생이 언제 어떻게 마감될지 몰라 미리 사죄드리오니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의 말씀-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 여러분! 저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제 젊음을 다 바쳐 가꾼 정든 전남대학교병원을 곧 떠나가게 됩니다. 그간 덕도 쌓지 못하고 부질없는 것들을 추구하다가 나와 다른 분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제가 실패한 것은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믿습니다. 이제 정든 대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아무 힘도 없고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가 된 한 노교수가 모든 자존심을 강물에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간곡히 드리는 부탁이오니 다음 말씀을 꼭 가슴에 새겨주시기를 두 손 모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남대학병원을 더욱 발전시켜주십시오.」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 여러분! 저는 보직도 없고 힘도 없는 평교수이지만 여러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의 진심어린 정성과 사랑을 담아 이글을 올립니다. 요즘은 가운을 입고 병원을 지나가도 많은 젊은 의사들이나 일부 소수의 직원들은 제가 인사를 하려고 해도 목에 힘주고 지나가버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는 마음 접고 "그러려니" 하고 지나갑니다. 기분이 불쾌하다기보다 안타깝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나는 나의 은사를 존경하겠노라"를 알기나 하는 것인지---. 그러나 그러한 젊은 의학도들이나 일부 소수의 직원들이 앞으로 독서를 많이 하고 사유하는 삶을 살면서 보다 많은 삶의 지혜를 얻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리라 믿습니다. 독일의 문호 마르틴 발저가 말했듯이 사람은 읽어서 만들어집니다.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후학들이나 젊은이들이 인간학을 다룬 책들을 항상 가까이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의 앞으로의 계획-

저는 최근부터 교수가 된 후 연구실에 모아두었던 논문들과 의학서적들을 조금씩 날마다 손수 버려서 방을 비우고 있습니다. 금년 연말까지는 텅 빈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물론 그간 교수로서 누렸던 기득권이나 대접 등도 금년 말에는 모두 흘러가는 강물에 버리겠습니다. 교수, 의학박사, 의사, 소아과 전문의, 소아청소년 심장전문의, 전남대학교병원 진료처장, 전남대학교 도서관장, 그외에 수없이 많은 학술단체 감투들---. 이제 이런 감투들이 새겨진 명함들을 모두 없애버리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정년퇴임하는 날까지 오직 진료하고 후학들 교육에만 전념하고 퇴임 후 인생후반기를 살아갈 준비를 할까합니다. 허혈성 심장병 전문가들에 의하면 저는 중병상태이나 하느님이 저를 보호해주시고 있어 당분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절망했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심하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벗과 병든 내 영혼을 정화시켜 평상심으로 돌아오게 해줄 수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힘을 얻어 날마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답게 가치 있게 살고 있노라면 언제가 하느님께서 부르시겠지요, 그 때 “예, 주님”하고 달려갈 준비를 지금부터 하려고 합니다.




-맺음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전남대학교병원 구성원 여러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며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변합니다. 가까웠던 사람도 시절인연이 다하면 떠나갑니다. 저는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믿고 "그러려니" 하고 살면서 서운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너무 짧은 우리 인생입니다. 서로 미워해서 남은 것은 서로의 상처뿐임을 삶을 통해 많이 경험했습니다. 구성원들끼리 존중해주고 사랑하고 힘들 때 위로해주고 도와주며 사십시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입니다. 생의 섣달 그믐날을 맞이하여 삶을 결산해보면 사랑했던 일만이 남을 것입니다.




청마의 해인 2014년의 설이 가족과 이웃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는 즐거운 명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전남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마재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