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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4가지 투구모양, 성경의 4대 복음서를 상징

(사진=위키피디아)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다보면, 온갖 희한한 모양의 투구를 쓴 기사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양쪽 끝에 뿔을 단 투구부터 날개를 단 투구, 닭벼슬같은 갈기를 단 투구,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양철깡통같은 민머리 투구 등 크게 4종류로 나뉜다.  

단순히 두부 손상을 막을 방어용구로만 생각한다면 이런 화려한 장식들이 거추장스러울 수 있지만

 사실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바로 성경의 4개 복음서 주인공인 마태오, 마르코, 요한, 루카를 상징하는 머리장식인 것.  

민머리 투구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사람이자 마태복음의 주인공인 마태오를 상징한다.

갈기가 달린 투구는 사자를 상징으로 삼는 마르코, 날개모양은 요한복음서의 사도 요한,

뿔은 황소를 상징으로 하는 루카를 의미한다.

단순히 적에게 공포심을 주거나 화려함과 권위를 의식해서 만든 장식들이 아닌 셈이다.  

왼쪽부터 구호기사단, 성전기사단, 튜튼기사단 모습(사진=위키피디아)

특히 이 희한한 투구 양식들이 유행했던 시기는 전 유럽이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들끓었던 십자군원정 시기였다.

이 시기는 기사들의 전성기이자 대규모 기사단이 유럽 전역에서 발족한 시대였다.

당시 기사들은 세속기사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기사수도회 출신으로 평화시엔 사제로서 활동하는 사제단이었다.

 그래서 기사단은 보통 'Order'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는 영어로 본래 결사나 집단 등을 뜻하는 일반 명사였다.

수도회 역시 'Religious order'라 불렀으며 후대로 갈수록 'order'자체가 기사단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이것은 중세시대 세속 기사들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원래 세속기사는 세속영주의 수하로 영주에게 봉토를 하사받는 대신 1년에 40일간

 군역의 의무를 지는 쌍무적 계약관계의 가신을 뜻한다.

그러나 기사단은 머나먼 성지까지 굳건한 믿음 하나로 진군해야하는 조직이다보니

이런 세속 기사들을 주축으로 전쟁을 맡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수도사제들 중 이교도와의 전쟁을 위해 특별히 전투가 허락된 기사수도회가 유럽 전역에 창설됐다.

보통 십자군 전쟁이라 하면 성지 예루살렘으로 진군한 동방십자군만 뜻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당시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향한 자들 외에도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를 받던 스페인으로 간 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스페인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칼라트라바(Calatrava) 기사수도회를 비롯한 레온(Leon)의 알칸타라(Alcantara),

포르투갈의 오비쉬(Oviz), 아라곤(Aragon)의 몬테사(Montesa) 등 각종 기사수도회들이 창설됐다. 

팔레스타인과 스페인 일대에서 이들은 그야말로 악명을 떨쳤다.

중무장한 기사들이 집결해 한꺼번에 몰려오자 당시 분열돼있던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제대로 된 방어를 펼치지 못했다.

1095년 처음 결성된 동방십자군은 1291년, 최후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지중해로 쫓겨날 때까지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중동지역 전체 판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스페인으로 간 서방십자군은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부르는

고토회복에 성공했으며 700년에 걸친 이슬람의 지배를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사제들이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처음엔 반감이 컸기 때문에 주로 철퇴로 적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 선호됐다고 한다.

 이는 이교도의 잘못된 정신을 철퇴로 내리쳐 '일깨워' 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기사단의 활동영역은 넓어지고 세속화가 심화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탈과 파괴, 살인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해적으로 전락하거나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이권집단 중 하나로 변질된 기사단들은

 점차 각국 국왕들은 물론 로마 교황청과도 사이가 악화됐다.  

의료봉사단체로 재건된 구호기사단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결국 주님의 이름을 걸고 목숨을 바쳐 성지를 향해 나아갔던 이들은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십자군 원정 이후 대다수가 살해되거나 강제 해산됐다.

 보통 프랑스에서 몰살당한 이후 비밀결사단으로 변했다고 민간에 알려진 템플기사단,

 해적행위로 연명하다가 영토가 사라지며 유명무실해진 구호기사단 등 각종 기사단들이 14~15세기를 전후로 사라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기사단들은 과거의 영광을 유적으로 삼고 있지만 군사집단이 아닌

 구호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봉사단체로 재탄생됐다.

천년의 세월을 거쳐 드디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닌, 자신들의 본업으로 돌아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