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단어 룰러(ruler)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배자, 통치자란 의미와 함께 길이를 측정할 때 쓰는 눈금자를 뜻한다.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이 두가지 의미는 의외로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눈금자, 즉, 척도를 만들고 관리하고 사람들에게 쓰도록 강제하며 그 척도로 세금을 거두는 자가 바로 그 나라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탐관오리들의 주요 수탈방법은 이 척도를 조작하는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조정의 관인이 찍힌 눈금자를 멋대로 늘리거나 가짜 눈금자를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옷감을 세금으로 받으면서 정량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척도를 속이는 것.
이런 척도 조작은 탐관오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훨씬 광범위하게 이뤄졌는데 지역상인들과 귀족들, 심지어 이들을 관리·감독해야할 관료들과 교회까지 한통속이 돼서 척도를 속이고 뒤바꾸는데 앞장섰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빵의 밀가루 함량이었다. 밀가루를 재는 단위를 슬그머니 다른 단위로 바꿔버리고 남은 밀가루로 뒷돈을 챙기는 방식은 대단히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이었다.
 | | 구석기시대 사용하던 눈금돌(사진=문화재청) |
이러한 뒷거래를 지역마다 하다보니 동네마다 도량형이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시기 프랑스 한 나라에서만 쓰이던 도량형이 25만개에 이르렀다. 그나마 중앙집권국가인 프랑스가 이 정도였으니 300여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진 독일지역은 훨씬 문제가 복잡했다. 더구나 각 지역의 척도에 맞춰서 법적 규제도 달랐기 때문에 운송업자들이나 원거리 무역상들은 골치를 앓았다. 이런 규제를 피하는 방법도 결국 모두 뒷돈을 바치는 것이다보니 그만큼 운송료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이 수천년간 이어오던 악습을 뽑기 위해 등장한 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표준단위인 미터법이다. 흔히 미터법은 프랑스 혁명정부의 작품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론 루이16세 치하 왕정에서부터 준비했던 제도다. 전반적인 도량형 개혁을 위해 노력 중이었던 당시 왕정은 과학기관이었던 프랑스 아카데미의 주도 하에 새로운 도량형을 만들 것을 의결했고 루이16세의 명에 따라 측량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루이16세가 국왕으로서 남긴 마지막 치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당시 프랑스 아카데미는 자국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과학자들과 보편타당한 표준측량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제시된 것이 영원불변할 '지구'를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1799년, 당시 프랑스 혁명정부는 지구자오선 길이의 4000만분의 1을 1m로 삼아 모든 단위의 기본으로 정했다. 미터는 길이 뿐만 아니라 부피와 무게까지 모든 단위의 척도가 됐다. 1기압에서 각 모서리의 길이가 10cm인 정육면체와 같은 부피의 4℃의 물의 부피를 1ℓ로, 그 물의 질량을 1kg이라 정했다.
 | | 1894년 우리나라에 도입된 국제미터원기(사진=국가기술표준원) |
하지만 새로운 도량형의 보급은 쉽지 않았다.
도량형의 변화는 곧 엄청난 이권다툼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지역상인들과 지역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권 외에도 기존에 사용하던 도량형의 포기는 수많은 지역문화와 기술의 단절과도 연결되는 문제였기에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힘든 문제였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이것을 강제하기 시작했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의 구체제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미터법도 여러나라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미터법은 단순히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새로운 도량형에서 세계화 물결의 선두로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터법이 세계 공용의 표준 척도로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은 1875년 미터법 조약이 발효된 이후였다. 이후 전 세계 모든 공장, 건축현장, 교육시설에서는 표준도량형으로 미터법이 사용됐다. 이러한 미터법의 세계화 물결을 끝까지 이를 반대한 것은 영미권 국가들로, 특히 영국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야드파운드법을 고수했다. 2010년 유럽연합(EU) 가입국들이 미터법을 표준 척도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영국도 결국 고집을 꺾었다.
하지만 대서양너머 미국은 여전히 미터법의 표준화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가전제품들은 그래서 아직도 화면크기를 분류할 때 센티미터(cm)가 아니라 야드파운드법의 '인치(inch)'를 기준으로 쓴다.
 | | 1962년 사용되던 택시요금 미터기(사진=국가기록원) |
그러다보니 야드파운드법과 미터법이 함께 뒤섞여 쓰이면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때도 많다고 한다.
지난 1999년 9월, 화성 궤도에 진입하던 미국의 화성 기후탐사선이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추락했는데 그 이유는 서로 다른 척도 표기 때문이었다.
이 탐사선을 제작한 록히드마틴사는 무게의 단위로 파운드를 사용했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킬로그램을 사용하다 보니 추진력을 계산할 때 착오가 생기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의 혼란 속에 1억2500만달러의 막대한 예산이 대기권 너머로 날아간 셈이다. 그러다보니 미국 정·재계에서 해묵은 논쟁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 또한 미터법 도입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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